시민행정신문 이준석 대기자 | 세상사를 보면 참 묘한 아이러니가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등하불명燈下不明, “가장 밝은 등불 아래가 오히려 더 어둡다”는 말이다. 불을 켜두면 멀리까지 비추지만 정작 그 불 바로 아래는 늘 그림자에 묻힌다.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이 오래된 격언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멀리 있는 문제에는 걱정이 많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진짜 위험과 아픔에는 둔감하다. 국가적 재난에는 분노하고 정치적 이슈에는 뜨겁게 반응하면서도,
바로 곁에서 고통받는 이웃, 가정에서 힘겨워하는 가족, 그리고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진짜 나’는 자주 놓친다. 밝게 켜진 사회적 관심의 범위 바깥에서 수많은 그림자가 조용히 자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 문제는 결국 우리 모두의 짐이 된다. 최근의 여러 사건을 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란 작은 균열’이 얼마나 큰 파국으로 이어지는지 반복해서 보여준다.
학교폭력은 가족의 눈앞에서 시작되고, 범죄 조직은 지역사회 가장자리에서 자라며, 부정부패는 늘 조직의 가장 가까운 내부에서 싹텄다. 하지만 이미 큰 문제가 되어 터지기 전까지 우리는 거의 보지 못했다. 왜일까? 문제는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눈이 멀어서였다. 등불은 멀리 비추느라 바쁘지만 자기 발밑을 비추는 일에는 소홀한 법이다.
관심의 초점을 ‘멀리’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 등하불명은 결국 관심의 방향을 말한다. 멀리 있는 여행지의 안전은 걱정하면서 정작 집 문단속은 허술할 때가 많다. 세계 경제위기는 걱정하면서도 내 가족의 마음이 무너지는 신호는 놓친다.
사회 정의를 외치면서도 옆 사람에게 건네는 한마디 친절은 부족하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먼 곳의 거대한 이슈만 좇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부터 밝히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가·사회·가정·개인 모두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등하불명은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지 않는다. 국가와 제도도, 조직과 공동체도 같은 원칙을 안고 있다. 정작 국민이 체감하는 복지 사각지대는 왜 어두운가 조직의 부정은 왜 내부에서 먼저 발견되지 못하는가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왜 묻히는가 나 자신은 왜 가장 가까운 가족과 나를 돌보지 못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등불의 밝기’보다 ‘등불 아래의 어둠’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등불의 진짜 역할은 먼 곳을 비추는 것이 아니다. 등불은 원래 내 앞을 비추기 위해 존재한다. 멀리 비출수록 좋아 보이지만 삶의 지혜는 늘 가까운 것을 바로 보는 데서 시작된다. 내 가족, 내 동료, 내 이웃, 그리고 내 마음까지. 가장 가까운 곳을 밝히는 순간 우리 사회는 비로소 진정한 빛을 갖게 된다.
우리가 먼저 ‘등잔 밑을’ 밝힐 때 사회 전체가 환해진다. 등하불명은 결코 숙명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 우리의 시선, 우리의 책임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빛도, 그림자도 바뀐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 “내 발밑의 어둠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밝히는 순간, 우리의 사회는 이미 조금 더 나아진다.














